공부하는 시2 캐비닛 속의 연가 외 2편 / 이중동 캐비닛 속의 연가 그는 어느 귀퉁이에 서 있었지 흰 벽을 배경삼아 버티고 선 당당함이 견실한 남자를 닮았다고 생각했지 내가 그의 몸을 더듬으며 들어가 누웠을 때 나는 태아처럼 편안했어 지상에 의지할 한 평 다락도 없었을 때 어둡고 차가운 몸뚱이를 그가 알아주었지 팔다리를 꼬거나 이마를 대고 누우면 비좁던 어둠도 천천히 평수를 늘려갔지 그는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주인이 되었지 그의 품 안에서 익숙해진 고독을 견디면서 나는 애벌레처럼 우화를 기다리고 있었어 오랜 침묵과 끊어진 인연들은 나를 점점 순종의 계절로 넘기고 말았지 언제부턴가 그는 내 안의 올가미가 되어 나의 숨결마저 조이고 있었지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귀퉁이에 서 있을 뿐 나는 캄캄한 어둠이 좋았지 식후 30분 뱀 한 마리 동굴을 기어 나와 독기.. 2020. 6. 18. 병에 대한 오해 / 이중동 병에 대한 오해 / 이중동 상가(喪家) 한구석 속이 훤히 보이는 냉장고가 떨고 있다 독기 품은 시퍼런 술병들 오와 열을 갖춘 채 보무도 당당하다 한 무리 문상객들이 들이닥치자 맨 앞줄에 선 병들 쨍그랑쨍그랑 나팔 불며 진군한다 전장엔 어느새 연기가 자욱하다 적들은 저마다 투명한 칼을 움켜쥐고 말들을 쏟아낸다 지난 전투의 무용담을 신나게 늘어놓는 놈도 있다 여기저기 창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첨병들이 목구멍을 타고 적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자 적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항한다 개중에 힘 빠진 놈은 엉덩이를 쳐들고 줄행랑 치고 새로 투입된 지원병들이 그 자리에 앉는다 독기를 품고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는 푸른 병사들, 밤새 일진일퇴 격전을 벌인다 망자 또한 .. 2020. 3. 18.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