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에 대한 오해 / 이중동
상가(喪家) 한구석 속이 훤히 보이는 냉장고가 떨고 있다
독기 품은 시퍼런 술병들
오와 열을 갖춘 채 보무도 당당하다
한 무리 문상객들이 들이닥치자
맨 앞줄에 선 병들 쨍그랑쨍그랑 나팔 불며 진군한다
전장엔 어느새 연기가 자욱하다
적들은 저마다 투명한 칼을 움켜쥐고 말들을 쏟아낸다
지난 전투의 무용담을 신나게 늘어놓는 놈도 있다
여기저기 창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첨병들이 목구멍을 타고 적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자
적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항한다
개중에 힘 빠진 놈은 엉덩이를 쳐들고 줄행랑 치고
새로 투입된 지원병들이 그 자리에 앉는다
독기를 품고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는 푸른 병사들,
밤새 일진일퇴 격전을 벌인다
망자 또한 언제부턴가 병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의 공격은 결코 하루도 멈추는 날이 없었다
시시때때 밀려드는 병들의 계략에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비우면 비울수록 수심도 깊어지는 병
밤새도록 푸른 병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투명한 벙커를 지키고 있다
이중동 시인
경북 성주 출생, 2019년 <창작21> 신인상 등단
'시 > 오늘 읽는 한 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캐비닛 속의 연가 외 2편 / 이중동 (0) | 2020.06.18 |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