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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춘문예,신인상

2019년 <창작21>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화문(花紋)외 4편-이중동

by 조각달빛 2019. 12. 12.


화문(花紋)


한바탕 가을비가 지나간 날
철제대문 페인트 틈으로 비치는 녹물을 본다
빗물이 바람의 씨를 받아 꽃을 피운 것일까
늦가을 마른 꽃 같은 무늬가 생겼다
대문 사이사이 꽃들이 바람에 서걱거리고 있다

저문 들길을 걷다가 마른 쑥부쟁이 꽃을 본 적 있다
향기 피워낸 자리마다 쪼그라든 생을 붙잡고 있었다
잎과 잎이 빛과 바람을 들이고 낼 적마다
영겁(永劫)의 각질이 한 겹 한 겹 쌓여가고 있었다
빛과 바람은 쑥부쟁이 꽃을 쪼그라들게 한 욕망이다

팔순 아버지의 얼굴에도 마른 꽃이 피어 있다
하늘의 별들이 명멸하고 
수심(愁心)이 비바람처럼 가슴 속을 들락거리는 동안 
거뭇거뭇 마른 꽃이 피어났다

대문에 번지는 저 녹물은 수심의 그늘
저물녘 새 한 마리가 마른 꽃을 쪼고 있다
저 새 또한 우주의 문밖을 통과한
시간이 피운 꽃의 잔상인지도 모른다

 
붕어화석에 관한 고찰
 
붕어가 관 뚜껑을 열고 헤엄쳐 나온다
노란 붕어가 지느러미를 흔들며 거리를 유영한다
지느러미가 흔들리자 거리는 한순간 물길이 된다
물길이 거세지자 가로수가 뿌리째 뽑힌 채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처를 잃은 새들도 날개를 접고 연못으로 뛰어든다
지느러미가 돋은 새들이 물속을 헤엄친다
거리에 늘어선 가게들이 종종걸음을 친다
진열대 안 마네킹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화장을 한다
해장국집 창문들이 뼈다귀를 쏟으며 덜컹거린다
국숫집 처마들이 면발을 늘리며 거리를 측량한다
평수를 늘려가던 부동산119가 계단을 급히 오르내린다
부활한 예수를 매단 교회들이 하늘에서 춤을 춘다
돋보기를 고쳐 쓴 안경점이 길을 읽는다
골절된 거리를 판독한 정형외과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린다
증권거래소가 지폐로 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길을 잃은 자동차는 전속력으로 연못 속을 달린다 
순찰차도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초를 입은 사람들이 컴컴한 연못 속을 헤엄친다
집들이 연못 위에 둥둥 떠다닌다
행인을 잃은 가로등이 물가에서 저녁을 밝힌다
연못 속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빵틀에서 나온 붕어들이 허기의 물바다를 누비며
어둠속을 달음질치고 있다

 
언덕 아래 잠들다
 
푸른 짐승 한 마리 한뎃잠을 자고 있다
후미진 골목길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의 각진 인상을 푸느라 햇살은 부산하고
찢어진 상처를 덮느라 담장 밑 장미 그늘은 바쁘다
조무래기 참새들이 쉴 새 없이 
등짝 위를 들락거리는 동안
그는 꿈속의 하늘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온종일 등을 짓누르던 무게를 내려놓고
빈 몸으로 취한 휴식은 달콤했을 것이다
때로는 질주본능에 돌 세례를 받고
밤샘 먹이사냥으로 비틀거리기도 했던
그러다가 네 다리가 동그랗게 변해버린 짐승
방랑벽의 구름은 그의 짝이 되지 못했고
수다쟁이 새들은 그의 벗이 되지 못했다
만일 그의 몸뚱이가 다시 꿈틀거리기라도 하면 
어떤 짐승도 그를 짓누르지 못할 것이지만
이제 골목은 막다르고 퇴로마저 없다

오물로 엉켜있는 담장 밑,
빈 몸으로 숙면에 빠져있는 1톤 트럭 한 대
꿈속에서도 직진 방향으로 핸들을 잡고 있다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것들은 평온하다
꿈을 접지 못한 욕망만이 불안하게
거친 도로를 정신없이 굴러가고 있다

 
분홍돌고래

그녀의 등지느러미에선 파도소리가 들린다
물살을 가르는 지느러미 사이로
넘실대는 남중국해의 푸른 물결이 보인다
온몸을 짓누르던 수압과 
한순간에 지워진 바다의 항로를 기억하는 일은 전설이다
그녀가 이국의 강을 거슬러 오를 때
강은 그녀의 유일한 본능이었다
맨몸의 가계와 거친 모국어를 잊기 위해
시력은 흐려지고 주둥이는 줄여갔다
강은 오를수록 목줄을 좁혀왔다
수심을 가늠하지 못한 그녀의 지느러미도 
점점 힘을 잃어 갔다
강물은 마르고 우기는 오지 않았다
더 오를 수도 없는 강의 끝에는 
조련사의 호각소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로 향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녀가 보내는 음파는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
다시는 바다로 돌아갈 수는 없는 향수 때문에
그녀의 몸은 노을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팽팽한 간격
 
바람 없는 흰 하늘에 나비 한 마리 날고 있다
날개를 펄럭이며 옅은 바람을 모으고 있다
더듬이가 감지한 방향은 알 수 없으나
나비는 제 날개의 무게로 바람을 일으켜 균형을 잡고 있다
섬돌위에 앉은 푸른 눈의 고양이
나비의 궤적을 추적하며 간격을 조절하고 있다
나비와 고양이의 팽팽한 간격 사이에서
고양이의 눈빛만이 불안하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것들은 우울하다

섬돌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년의 날들,
하늘에는 비행기가 흰 길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비행운을 따라가던 눈길이 무심코 나비를 보았다
나비의 날갯짓이 신작로 위로 피어나던 아지랑이인지
연못 위에 일렁이던 잔물결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비는 섬돌위로 떨어지는 햇살들 사이를 날았고
나는 나비를 향해 팔을 뻗었으나 내 팔은 충분히 짧았다
나는 종종 나비를 타고 구름 위를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그런 날은 섬돌아래 코를 박고 애꿎은 개미집만 후벼댔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은 늘 가까이에 있다

운보의 그림 고양이와 나비,

잡히지 않는 날개와 잡을 수 없는 푸른 눈
그들 사이에 간격만이 팽팽하다


 

이중동 시인 약력

경북 성주 출생

2019년  계간 (창작 21) 신인상 당선



<심사평>

  말없는 우주 만물에서 영감을 끌어내 연민을 울리고

  말이 없는 우주 만물에서 마이더스 손처럼 시인은 한 사물을 찾아내 시화시키고 의미를 되살려낸다. 또 여기에 영감을 넣으며 다른 사람에게 심금을 울리는 경지까지 가게 한다. 한국이 시인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지만 중국은 당나라 시대가 이미 시인공화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낙신부>에 등장하는 낙포공원에 갔다가 천변 가로등마다 모두 당나라 시가 촘촘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또 두보 시 <등악양루>를 만나러 동정호에 갔다가 호수 주변에 당나라 시인들의 시가 시 새김돌에 끝없이 이어져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국의 지하철 안전문의 시처럼. 시인공화국에 시를 쓰는 시민이 된다는 것.

  녹슨 대문, 붕어빵, 삐에로, 맨드라미, 캐비닛, 돌고래, 나비 등 사물이 이중동 시인의 영감을 끌어냈다. 영감을 끈 영적인 사물에 은유와 역설 등의 기법을 중첩시키면서도 끝없이 울려주는 감동의 세계. 시를 쓰기는 어렵고 읽기는 조금 쉬운 법.

  박완서 작가의 마른꽃』과 김문수 작가의 『성흔』이라는 소설이 동시에 중첩되어 떠올려지는 시 『화문』. 어쩌면 시골 농가인 옛집을 바라보며 회한을 드러냈는지 모른다. 팔순 아버지의 마른 꽃과 닮은 꽃이 시간이 피운 잔상의 아름다움과 연민 품음으로 잘 드러냈다. 한뎃잠을 자는 한 노동자를 연상시키는 푸른 짐승, 그에게 햇살과 장미그늘, 조무래기 참새들, 방랑벽의 구름, 수다쟁이의 새들이 한없는 친구임을 『언덕 아래 잠들다』에서 시인은 반전의 미학을 발견해내고 있다. 퇴로 없는 골목에 사는 힘들고 거칠게 살아온 이들에 대한 연민과 따뜻함이라 느껴졌다. “팔순 아버지의 얼굴에도 마른 꽃이 피어 있다/ 하늘의 별들이 명멸하고/ 수심愁心이 비바람처럼 가슴 속을 들락거리는 동안/ 거뭇거뭇 마른 꽃이 피어났다// 대문에 번지는 저 녹물은 수심의 그늘/ 저물녘 새 한 마리가 마른 꽃을 쪼고 있다/ 저 새 또한 우주의 문밖을 통과한/ 시간이 피운 꽃의 잔상인지도 모른다.

심사위원: 박주하 문창길 임금복(평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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